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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상식

가톨릭 일반
수도생활

 1. 개념 : 수도생활이란 고등종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현세적 가치를 포기하고 일반사회를 등진 생활양식이다. 공통된 점은, 재산의 포기[가난]와 가정생활이 포기[독신]이며, 경우에 따라서 여러 가지 고행과 집중적인 기도가 수반된다.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을 불교나 힌두교의 경우에는 ‘승려’, ‘비구니’(比丘), ‘수행자’(修行者)라고 하는데,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는 수도자([라] religiosus)라고 한다. 현재 천주교회에서는 교회(교황청이나 교구장)에서 정식으로 인준된 수도회에서 서원(誓願)을 발한 자만을 수도자(남자 : 수사, 여자 : 수녀)라고 한다.

   2. 신학적 고찰 : 그리스도교에서는 수도생활이 그리스도에 대한 추종의 한 형태로 나타난다. 수도자들은 "동정이며 가난하신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속하시고 성화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자기를 하느님께 특별한 방법으로 봉헌하는 것이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수도생활의 쇄신적응에 관한 교령 1조). 하느님 나라에 전적으로 종사하기 위해 예수는 재산과 가정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복종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가난(청빈)과 독신(정결)과 순명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래서 중세기 이후에 수도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가난과 독신, 그리고 수도규칙(회칙)과 장상에 대한 순종을 3가지 복음적 권고라고 했으며, 수도서원을 통해 이 3가지를 선서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5장과 6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복음적 권고를 지키는 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제시되는 완덕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은사와(1고린 7:7) 이 은사를 내리심으로써 하느님은 개인을 수도생활에 부르신다(=부르심, ‘성소’). 그런데 은사는 성신이 교회의 건설을 위해 자유롭게 나누어주시는 것이므로 수도자들이 교회에 봉사하는 범위는 각 수도회의 특별한 은사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복음적 권고의 실천에 의한 수도신분의 공통된 직능은 표지(標識, signum)와 증거의 역할이다. 수도자들은 그 생활양식으로 "진복팔단(眞福八端)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세상을 변형시킬 수도 없고 하느님께 봉헌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며"(교회헌장 31조) "이 세상에 이미 현존하는 천상 보화"와 풍부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제시하고 모든 신자들이 고대하는 "천국의 영광을 예고한다"(44조). 그래서 수도신분을 종말론적 존재라고 한다. 위의 생활양식을 유기(有期)로 영위하는 일이 가능하지만, 수도자는 일생토록 수도서원을 서약하여 자신을 완전히 하느님께 봉헌하여 축성을 받는다. 그래서 최근에 교회에서는 수도생활을 봉헌된 또는 축성된 생활(vita consecrata)이라고 즐겨 부른다.

   3. 수도생활의 역사 : 넓은 의미에서의 수도생활은 예수와 사도들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재산을 포기하고 독신을 지키며 교회의 봉사를 위해 개인의 욕망을 버린 사람은 교회역사 초기부터 있었으며 남자의 경우는 금욕자(禁慾者, asceta)로, 여자의 경우는 동정녀(童貞女)로 불렀다. 이미 2세기부터 그들은 특별한 존경을 받았으며, 특히 동정녀들의 신분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거주나 복장으로는 일반사회인이나 신자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수도생활은 기원후 300년 전후에 시작되었다. 열렬한 신자들은 도시를 떠나 광야에 은거하며 정신적 공간적으로 사회와 전혀 다른 특수한 생활양식을 개척하였다. 이런 운동은 먼저 근동지방에서 일어났으며, 그중 특히 이집트의 은수자(隱修者, eremita, anachoreta)들이 다른 지방의 금욕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 안토니오(St. Antonius, Eremitus, 251~356)는 이집트 수도승들의 아버지 및 천주교 수도생활의 시조(始祖)로 알려졌다. 당시 수도생활의 특징은 고행이었다. 수도자들은 단식과 철야기도 및 육체노동으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입증하려고 하였으며, 외딴 곳에 혼자 사는 은수자와 함께 모여 사는 공주수도자(共住修道者, coenobita)와 서로 가까이 사는 반 은수자(半~, semi-eremita) 등이 있었다. 이집트의 공주생활을 조직하고 최초의 수도규칙서를 쓴 분은 성 파코미오(St. Pachomius, 292-346)였으며, 아타나시오 성인(295-373)이 ≪안토니오전(傳)≫을 저술하여 동방의 수도생활을 지방에 소개, 선전한 이후 서방에서도 이 운동이 크게 퍼졌다. 서방의 고행은 동방만큼 심하지는 않았으며 은수자보다 수도원이 많은 것이 특색을 이루었다.

   서방에서 생긴 많은 수도규칙 가운데 성 베네딕토(480-547)가 저술한 규칙서가 가장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규칙서를 지키는 수도원이 점차 늘어 800년 이후에는 베네딕토의 전통을 지키는 수도자들은 정주(定住, stabilitas)를 약속하여 일생 동안 같은 수도원에 머무르면서 비교적 큰 공동체를 이루고 공동으로 바치는 성무일도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수도원들은 중세사회의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경제적 내지는 정치적 세력도 막강하였다.

   13세기 초에 도미니코 성인과 프란치스코 성인의 등장으로 아주 새로운 수도생활의 형태가 생겨났다. 이들은 가난과 설교를 강조해서 노동과 경우에 따라서는 구걸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소단위의 공동체에 살면서 자주 이동하였다. 또 조직면에서 자립수도원을 만들어 온 베네딕토의 전통과는 달리 총장이 다스리는 수도회를 조직하여 서울 지방에 따라 관구(管區)로 나누었다. 그리고 외딴 곳보다 도시 가운데 살면서 사목(司牧)에 힘썼다. 그 뒤 1534년에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가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양식을 구상하였다. 그가 설립한 예수회(會)는 교회를 위한 봉사단으로서 회원들은 수도복을 입지 않고 공동예배를 드리지 않으며 속세를 떠나기는커녕 오히려 파고 들어가 가장 위급하게 여기는 일들을 맡아서 처리하였다. 그 뒤에 생긴 근세의 수도회들은 예수회의 영향을 받아 대개 교회를 위한 봉사를 그 목적으로 삼았다. 그 가운데는 아주 구체적인 필요성을 위하여 설립된 회도 많은데 교육, 포교, 간호 등의 전문분야를 가진 수도회들이 지배적으로 많다. 반면 중세기보다 더 엄격한 봉쇄를 지키는 가르멜회도 근세에 번성하여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1515~1582), 십자가의 성 요한(1542~1591), 소화(小化) 데레사(1873~1897)와 같은 성인들이 배출되었으며, 20세기에는 샤를르 드 포코(1858~1917)의 규칙에 따라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사회 한복판에서 관상(觀想)생활을 영위하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와 자매회가 탄생하였다. 현대에는 수도자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사회인으로서 복음적 권고를 지키는 사람들이 생겼는데, 이들의 집단을 재속회(在俗會, 혹은 재속수도회)라고 한다. 이것으로 수도회의 역사가 한 바퀴를 돌고 초대 교회의 동정녀와 금욕자처럼 속세를 떠나지 않는 수도자(아니면 평신도)의 모습을 보여 주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활은 다른 수도회와 같이 교황청의 ‘수도자 및 재속회 성성’의 감독을 받고 있다.

   4. 한국의 수도생활 : 한국 교회 창립부터 신심 두터운 신자 가운데는 수도생활에 관한 서적을 보거나 신부의 권유를 듣고 독신생활과 고행을 하면서 교회를 위한 봉사에 전념한 분들이 있었다. 이 중 특기할 만한 것은 그 당시 유교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동정을 지키기가 너무 어려워서 동정부부의 길을 택했던 예들이다. 그러나 박해시대에는 조직적인 수도생활이 불가능하였으며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된 지 1년 뒤인 1888년에야 비로소 최초의 정식수도회가 들어올 수 있었다. 이때에 한국에 진출한 프랑스 출신의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는 그 설립목적에 따라서 자선사업과 사회사업에 힘썼으며 1900년 이후에는 교육과 본당사목에도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남자수도회로서 최초로 한국에 진출한 회는 교회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성 베네딕토회’였다. 1909년 독일에서 온 이 회원들은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Mutel, 閔) 주교의 요청에 따라 서울에 수도원을 두고 교육사업에 임하였다. 그러나 일제(日帝)의 탄압에 못 이겨 학교를 그만둔 다음 북한의 넓은 포교지역을 맡아서 수도원을 덕원(德源)으로 옮겼다. 그밖에 광복 전에 한국에 들어온 수도회는 메리놀 전교회와 함께 함경도에 온 메리놀수녀회(1942년), 원산에 온 포교 성베네딕토 수녀회(1925년), 대전에 온 프란치스코회(1937년), 그리고 한국에 처음으로 관상수도원을 세운 가르멜여자수도회(1939년) 등이다.

   이 무렵에 한국인으로만 구성된 방인(邦人) 수도회들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즉 1932년 평양에서는 메리놀회의 도움으로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가 창설되었고, 1935년부터 영남 지방에서는 훗날 포항 예수성심시녀회가 될 동정녀들의 작은 모임이 시작되었다. 방인수녀회들의 창립은 광복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953년에는 방유룡(方有龍) 신부가 한국 순교복자회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남자 방인수도회를 세웠다. 6.25전쟁 이후에 한국 교회의 발전이 세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자 살레시오회와 예수회를 비롯한 많은 남녀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현재(1983년도말) 한국 교회에는 14개의 남자수도회(선교단체 제외)와 40개의 수녀회가 있다. 방인 수도단체라도 대체로 서구의 수도생활을 모방하고 있으니 수도생활의 토착화는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한국은 성소가 많지만 남자 수도생활은 부진한 편이다. 수녀들은 매년 수백 명으로 늘어나지만(한국 천주교회 교세통계 1982년말 현재, 서원수녀 : 3,617명, 외국인 150명 포함) 한국 방인사제 가운데 수도자는 64명밖에 되지 않으며(6%, 세계평균치 : 36%), 수사의 수도 이와 비슷하다. 한국 수도생활의 특성은, 대다수의 수녀들이 일선사목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진 토마스)

   [참고문헌] 오늘의 수도자들, 한국천주교남녀수도회 소개, 분도출판사, 1983 / 라디슬라스 M 오르시, 성령께 마음을 열다, 성 바오로 출판사, 1974 / 르네 카방리에, 천국의 증인들, 가톨릭출판사, 1966 / A. 니콜라스, 희망의 지평 - 부르심과 응답, 성 바오로 출판사, 1977과 1981 / 조정옥, 축성된 생활, 효성여자대학교, 1982 / 사목, 33호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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