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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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상식

교회사
04 격동기의 천주교경
  • 옥수동성당2019-09-30137

1882년 미국을 선두로 하여 잇달아 체결된 구미열강들과의 조약, 특히 1886년의 프랑스와의 조약은 불완전하나마 조선에 처음으로 종교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이로써 선교사의 정착이 가능해지고 그 결과 본당조직이 발전하게 되엇다. 최초의 본당인 서울의 종현(오늘의 명동)본당은 대성당을 비롯하여 주교관, 수녀원, 인쇄소 등의 부속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종현에이어 원산, 제물포, 부산, 마산포, 목포 등 개항지에 잇달아 본당이 건설되고, 갓등이, 평양 등 주요한 교우촌과 주요 도시에도 본당이 건설되어 나아갔다. 또한 주교좌 성당 구내에 고아원가 양로원이 세워지고 그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프랑스로부터 수녀들이 진출하였다. 또한 용산에 서양식 신학교 건물이 세워짐응로써 한국인 성직자 양성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시기에 복음은 남쪽으로는 제주도, 북쪽으로는 국경을 넘어 멀 리 간도지방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정부, 특히 지방당국과 잦은 마찰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 것이 이른바 ‘교안’(敎案)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한불조약 이후 한국교회의 긴급한 과제는 한국인을 위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선교사를 위해서는 개항지 이외의 지역에서도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일이었다. 그것을 획득하려는 투쟁과정에서 지방에서 제 주교난(濟州敎難)과 해서교안(海西敎案) 등 교안이 무수히 발생하였다. 여기서 정부와 교회는 다같이 이와 같은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교민조약’(敎民條約)을 통해 어느 정도 합의점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교민조약은 1899년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와 내부(內部)의 지방국장 정준시(鄭駿時) 사이에 체결되었다. 이로써 한국인에게도 선교의 자유가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또한 5년 후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조약(宣敎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지방 본당에서의 선교사들의 정착권(定着權)도 법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천주교는 개화기에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회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애국계몽을 적극적으로 추 진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애국계몽 운동이기도 하였다. 천주교에서 발간한 <경향신문> (京鄕新聞)은 1906년 창간되어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되기까지 4년간 지속되었다. 국권이 기울어져 가던 시기에 <경향신문> 은 특히 내적 개화(內的開化)를 강조하면서 국민을 자강운동(自强運動)으로 계몽하고 인도하였다.
천주교의 교육사업은 처음에 국민교육과 기초교육에 치중해오다가 1909년부터 는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St. Ottilien)의 베네딕토회 선교사를 초대하여 사범교육과 실업교육을 실시하게 하였으나 일제하 일인들의 교육의 독점으로 폐교의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천주교가 국권수호운동과 독립운동에 범 교회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으로는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의병활동은 국권수호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제창한 서상돈(徐相墩) 역시 열렬한 천주교인이었다. 그의 주장에 호응하여 전체 교회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으며 <경향신문> 과 교회를 통한 이 운동은 1910년 한일합방 때까지 계속되었다. 합방 직후에 일어난 ‘안악사건’(安岳事件)은 황해도 지방의 유력한 천주교 신도였던 안명근(安明根)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으다가 발각된 사건이었다. 또 ‘105인 사건’의 한 사람인 이기당(李基唐)도 의주본당에서 활약하던 유지교우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교회당국의 절대적 금지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대구 신학교의 신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 때문에 일부 신학생들은 퇴학을 당하였고, 또 그 해에 있을 예정이던 서품식이 연기되기도 하였다. 이때 강화나 광주(廣州) 등지에서는 천주교인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지역에서 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천주교도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또한 은율의 윤예원(尹禮源) 신부는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였고, 안학만(安學滿) 신부는 만주의 독립군단체에 직접 가담하여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제의 종교탄압은 해를 더할수록 노골화하였으며 <경향신문> 은 일제의 탄압에 못이겨 폐간하였고, 이어 사범교육기관인 ‘숭신학교’(崇信學校)도 폐교 당하였다. 그 후 일제는 소위 ‘포교규칙’(布敎規則)을 제정하여 종교활동을 제재하였고, 심지어 교회학교의 종교교육까지 금지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는 처음에 신사참배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 일본 당국자들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를 거부한 결과 직장에서 추방되거나 투옥된 신자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1940년대에는 서양인 교구장들이 일인들로 대치되었고, 미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기타 선교사들은 구금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탄압 아래에서도 교회는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이 시기에 교구조직이 크게 발전하여 9개 교구로 증가하였고 또 교구조직의 발전과 더불어 메리놀과 골룸바노회 등 새 선교단체가 진출하였다. 1942년에는 서울교구장직이 한국인 노기남(盧基南)주교에게 넘겨짐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인 교구장 주교가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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