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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상식

교회사
03 박해
  • 옥수동성당2019-09-30138

천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의 탄압의 대상이 되어 근 백 년 동안 10여 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겪어야 하였다. 최초의 박해는 1785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집회를 가 지고 있을 때 관리들에게 검거됨으로써 일어났다[을사추조적발]. 체포된 신도들 가운데 중인 김범우만은 귀양을 가서 희생되었다. 그는 이 땅에서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조상제사를 거부했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신해박해]. 1795년의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에서 발단되었는데 주 신부는 피신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윤유일(尹有一), 최인길, 지황 등이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였다[을묘박해].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는 순조(純祖)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신유박해이다.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집권층에서는 천주교에 대 한 일대 탄압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 박해는 신생교회를 뿌리째 뒤 흔들어 놓았다. 이 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고, 교회의 지도자인 신도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또 이 박해에서는 이미 배교를 선언했던 이승훈, 김건순 같은 인물들에게도 정치적 보복의 성격을 띤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때 황사영의 백서사건(帛書事件)이 발생하였다. 초기교회에서 주요한 지도자중 하나였던 황사 영은 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하였다. 피신처에서 그는 박해의 상황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하는 편지[상서]를 북경주교에게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이 편지는 도중에 발각되었고, 그도 체포되었다. 이 편지의 내용 중에는 조선왕조의 체제를 부인하는 강경한 표현들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천주교의 성행(盛行)에 대하여 더욱 긴장하게 되었고, 황사영도 자신의 신앙 때문에 죽음을 당하였다. 헌종(憲宗) 때 두 번째로 큰 박해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1839년의 기해박해이다. 이 박해로 당시 3명의 선교사(앵베르 주교, 모방과 샤스탕 신부)가 모두 순교하였고, 또 정하상, 우진길, 조신철 등 교회의 요인들이 많이 순교하였다. 특히 정하상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어 천주교를 변호하고 박해의 비합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박해에서 프랑스선교사들이 순교한 결과 이제부터 조선정부의 천주교 탄압은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어 나아가게 되었다.
1846년의 박해(병오박해)는 김대건(金大建) 신부의 체포가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 최초의 신부로 서품된 그는 서해안에서 선교사의 입국 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남녀교우 9명이 그와 함께 순교하였는데 그중 현석문(玄錫文)은 다른 교우들과 같이 1839 년의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기해일기》를 남겼다. 1860년에 거듭된 박해(경신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놀라운 발전 을 이루었다. 이에 고종(高宗)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대규모의 박해를 강행하였다. 1866년 에 시작된 소위 병인박해는 그 후 근 10년간 계속되면서 병인양요, 남연군묘 두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신미양요 등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이 박해에서 재한선교사 12명중 9명이 희생되었고, 남종삼(南種三), 홍봉주(洪鳳周) 등 8,000여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순교하였다.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함에 따라. 선교사들의 재입국이 시작되었으나 곧 다시 체포되지만 리델(Ridel, 李福明) 주교와 드게트 (Deguette, 崔東鎭) 신부는 처형되지 않고 중국으로 송환되었다. 선교사에 대한 박해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시대로 변했던 것이다.
박해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정부가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邪敎)로 낙인 찍고, 천주교도들을 강상죄(綱常罪)로 다스린 때문이다. 이밖에 유교의 배타주의, 정교합일주의(政敎合一主義), 당쟁과 세도정치, 쇄국양이주의(鎖國攘夷主義) 등도 박해의 원인으로서 크게 작용하였다. 박해로 말미암아 처음에 교회를 주도했던 양반과 지식층이 물러나고 점차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처음에 주로 도시에 집중되었던 천주교는 박해로 인해 산간벽지로 들어가서 많은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천주교는 철종연대(1850∼1864년)에 비교적 편온한 시기를 이용하여 많은 교리서적을 인쇄 보급하여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시키는 한편 복음을 널리 전파시킬 수 있었다. 천주교는 수용 당시부터 민중의 글인 한글을 공용어로 채택함으로써 한문에 의한 지배층의 지식 독점화로부터 민중에 대한 지식확산이라는 측면에서도 크게 공헌하였다. 박해는 신앙의 눈에서 볼 때 틀림없는 교회의 승리이다. 그것은 교회가 박해를 받음으로써 도리어 발전한다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결국 천주교에 허용된 신앙의 자유도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로 여겨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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