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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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상식

교회사
02 교회의 환경과 조선교구의 설정
  • 옥수동성당2019-09-30126

천주교는 마침내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벽, 정약전 등과 더불어 신앙 공동체를 구성함으로써 정식으로 수용되었다. 이벽은 그의 친구 이승훈이 동지사(冬至使) 편에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북경에서 선교사를 방문하고, 영세를 청하고 또한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돌아오도록 간곡히 권고하였다. 과연 이승흔은 북경에 이르러 북당(北堂)의 그라몽(de Grammont, 梁棟材) 신부로부터 필요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란 본명으로 영세 하였고 또한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갖고 1784년 봄에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귀국하자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고, 그것을 친척 과 친지들에게 전도하였으며 그해 9월(음)부터는 영세를 주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가 탄생하였다.
이벽은 또한 정약전과 정약용 (丁若鏞) 형제를 찾아가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중인(中人) 계급에 전교하여 김범우(金範禹), 최인길(崔仁吉), 최창현 (崔昌賢), 지황(池璜) 등을 입교시켰다. 또한 학문과 명성이 높은 이들의 개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양근(楊根)의 권씨 일가를 찾아가 전도하였고 그 결과 권철신과 권일신(權日身) 형제를 개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권일 신은 개종과 더불어 복음전파의 열렬한 사도가 됨으로써 이승훈, 이벽과 함께 신생교회의 삼대지주(三大支柱)가 되었다. 그는 제자인 충청도 출신의 이존창(李存昌)과 전라도 출신의 유항검(柳恒儉)을 입교시킴으로써 복음을 멀리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까지 전파시 켰다.
이들 교회지도자들은 1786년에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실천하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물론 불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지와 선의에서 미사를 드리고,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전하였던 것이다. 당시 교회의 영수격이었던 이승훈이 먼저 신부(神父)로 선출되었고 이어 그는 또 다른 10명을 신부로 임명하여 성사를 집전하게 하였다. 가성직제도는 약 2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에 관하여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문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북경의 선교사들은 성직자의 영입을 권고하였다. 이에 그들은 다시 밀사를 파견하여 구베아(de Giuvea, 揚士選) 북경주교로부터 선교사 파견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고 그 결과 1794년말 중국인 주문모 (周文謨) 신부가 조선교회에 파견되었다. 주신부의 노력과 신도들의 열렬한 전교활동에 힘입어 조선교회는 크게 발전할 수 있었으니 그의 입국 당시 4,000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1800년에는 1만명으로 늘어났다. 신도들은 특히 명도회(明道會)란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교리를 익히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명도회의 초대 회장은 정약종(丁若種)이었다. 그는 신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주교요지》란 순 한글로 된 교리서를 손수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1년의 대박해는 교회를 거의 폐허화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를 위시하여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도 거의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던 신자들이 점차 새로운 신도집단을 형성하면서 무엇보다도 성직자 영입운동을 서두르게 되었다. 교회 재건에 힘쓴 당시의 신자 중에는 정하상(丁夏祥), 신태보(申太甫) 등이 있었고 그 후 새로 개종한 유진길(劉進吉)과 조신철(趙信喆) 등이 이에 가담하였다. 이들은 수시로 북경을 내왕하고 또는 밀사를 파견하여 북경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북경주교에게는 물론이요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 두 차례의 서한을 보내고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선교사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북경주교에게는 물론이요 교황에게도 1811년과 1825년경 두 차례의 서한을 보내고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선교사 파견과 그 보장을 애원하였다. 조선교구의 설정은 이와 같은 배경 아래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1831년 조선교구에게 위임되었던 북경교구의 관할권을 벗어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교우들 의 청원에 감동된 로마 성청에서는 조선에 교구를 설정하고 그것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하기로 하였다. 때마침 파리 외방전교회원 브뤼기에르(Bruguiere,蘇) 주교가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게 되었다. 조선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그는 조선입국을 서둘렀으나 그의 임지를 눈앞에 두고 중국 땅에서 병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을 이어받아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1836년 이래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1837년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范世亨) 주교가 입국하였다. 이로써 북경교구로부터의 조선교구의 독립이 명실공히 실현되었고, 동시에 조선교회는 교황청 및 파리 외방전교회와 대외적인 관계를 맺고, 이 지지를 얻게 됨으로써 그 장래가 완전히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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