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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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상식

교회사
01 교회창설의 배경
  • 옥수동성당2019-09-30140

근세초기의 지리상의 큰 발견과 이에 따른 세계적인 탐험여행은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을 초래하였고, 서세동점은 동시에 서학(西學)이 동점하는 계기가 되어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의 예수회는 스페인 예수회원 세스페데스(G. de Cespedes) 신부를 조선 남해안에 파견하여 일본인 천주교 장병들의 신앙을 돌보게 하였다. 물론 그는 토착인 즉 조선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민과의 적대관계로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일본으로 끌려간 납치자들 중 많은 이가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그들의 개종은 일본 예수회원들에게 조선전도의 희망과 관심을 일으켜 조선전도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모두 좌절되었다. 한편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도 북경에 왕래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전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들은 서양문물에 대해 새 지식을 얻고자 선교사들을 자주 찾았고, 선교사들 역시 그들을 기꺼이 맞이하고, 그들과 서양의 학문과 종교에 대해 필담을 나누었다. 이리하여 조선 사신들을 통해 서양문물이 처음으로 조선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예수회원들은 조선전도의 계획을 간접적으로 도왔다. 특히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친교를 맺었던 아담 샬(Adam Schall, 揚若望)은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전도를 시도하려 하였으나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좌절되었다. 중국으로부터의 조선전도의 시도 역시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자로 저술한 천주교 관계 서적들만은 17세기 초엽부터 계속 조선에 도입될 수 있었다. 이렇게 도입된 서적들은 특히 남인(南人)학자들에게 환영되고 연구됨으로써 실학운동에 자극을 주는 동시에 서학이란 새롱운 학풍을 낳게하였다. 《천주 실의》(天主實義)는 이미 간단하게나마 이수광(李 光)에 의해 소개되었고, 그와 동시대인인 유몽인(柳夢寅)은 서학의 천주(天主) 와 유교의 상제(上帝)를 동일시함으로써 《천주실의》에 대해 보유론적(補儒論的)인 논평을 가하였다. 이익(李瀷) 역시 《천주실의 발문(跋文)》에서 비슷한 논평을 하였다. 이익은 또한 《칠극》(七克)에 대해서도 보유론적인 논평을 하였다. 이익의 제자들 중에서는 학문적인 관심을 넘어서 서학에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고 신앙을 실천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홍유한(洪儒漢)은 처음으로 천주교 계명을 실천에 옮겼는데 그 때가 1770년경이었다. 이어 권철신(權哲身), 정약전(丁若銓), 이벽(李檗) 등에게서 천주교 신앙이 싹트게 되었는데, 주어사(走魚寺)에서의 강학(講學)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인생의 중요문제에 대해 유교의 경전에서 그 해결을 보지 못하자 서학서에서 그 해결을 찾아보고, 이어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벽 외에는 모두 계속하지 못하였고, 이벽 또한 천주교 서적의 부족으로 천주교 지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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